장보고는 완벽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력, 조선술, 항해술에서 장보고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영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잘 정비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상의 무역을 리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해양 사정은 장보고의 완벽한 실력으로 인해 신라ㆍ당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인재 발굴만이 개혁의 힘이다 세종이 인재를 선출하고 키우는 과정에는 유난히 배울 점이 많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재능있는 부하에게 관대하였고 왕이라고 해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세종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신하를 뽑는 과거에서
또한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도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국가가 안정하게 존속하려면, 충분한 군사력[足兵], 충분한 먹을거리[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과 마음[民信]을 모두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
8세기 후반, 장보고는 그의 의형제인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다. 두목은 장보고가 서주(徐州, 강소성 서주시)에서 무녕군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때의 나이를 30세였다고 하였다. 그가 30세에 무녕군 소장이 되었다면 완도에다 청해진을 828년에 설치하였으니 그가 당나라에 건너간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