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인 것이다.
따라서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대항해시대에 팽창하는 유럽의 상징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고, 급격하게 팽창하고 변화하는 유럽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항해시대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리스본의 대략적 역사와 위치, 그리고 당시에 리
시대인 16세기는 동시에 유럽이 항해를 통해 확대 팽창하는 대항해시대이기도 하다. 종래에 지중해나 발트해에 한정되었던 유럽인의 항해와 통상의 범위는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유럽무역의 몰락을 야기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서양연안의 국민은 15세기 말에 새로운 세계
문제 등 거시적인 측면으로 시대를 바라볼 수 있으며, 시대 간 단절이 아닌 연속적인 맥락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도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향신료가 어떻게 국제 교역의 중심을 아랍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게 했으며, 유럽을 대항해시대로 이끌었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의 일종인 까삐따니아(Capitania)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는데, 관리자의 역할 소홀이 가장 큰 원인에 자리한다. 그리하여 포르투갈 왕조는 1550년에 브라질 전체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총독부를 설치했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두가지 식민정책에 대해 지금부
믿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진출 프로젝트가 중세적이라고 볼 수 있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동방의 황금과 향신료를 얻고자 하는 상업적 동기도 존재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역시 이러한 상업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