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하였다. 1892년 베를린 대학을 시작으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이후에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연구를 계속했고 병후에는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과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등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 공장은 숙련 노동력을 수공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상당 부분을 취하고, 따라서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의 연마를 수공업에 위임하며, 숙련이 끝나면 노동력을 취해 간다는 숙지된 현상은 본질적으로 가톨릭의 수공업 노동자보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 뚜렷이 나타난다. 달리 말해 수공업의
개신교로 하여금 전통문화와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선교자유 중심’의 종교자유 이해는 개신교로 하여금 한국의 문화적 정황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개신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제일의 종교집단으로 존재하면서도
베버가 주장한 자본주의의 핵심은 이러한 태도가 프로테스탄트라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청교도주의 칼뱅주의를 이어받고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계약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지향하는 사상. 또는 그런 생활 태도.
가 이런 영향을 끼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막스베버는 1864년 4월 21일 생으로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일반적이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서로 상당히 상반된 성향의 사람들로 아버지는 상당히 현실적이며 현세에 대한 관심이 강했으며 내세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면, 그의 어머니는 현세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내세적인 측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