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함께 사서라 부르고, 사서야말로 공문의 사제전수에 도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가 여기에 베푼 주석 가운데 ‘대학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 ‘중용장구’는 그의 다른 여러 주석과 함께 신주로 불리며, 한 ·당의 고주에 비해 새로운 학문의 전개를 보여주
집주혹문》 《시집전》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의 신주’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 《맹자요로》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집주》로, 사망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주희가 《대학》 《중용》을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하여 오경(五經)의 입문서라는 위치를 부여한 것은 사상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즉, 하나는 유교의 길(道)의 정통적 전통을 인정하여 이것을 다시 계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던 유교문명의 관점에서 인사행정의 요소들을 고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의 범위를 조금 더 좁히기 위해 우리 조는 현실정치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사상가인 맹자의 관점에서 인사행정의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대전」을 편찬하였다.
②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당하관 이하의 관리들을 선발하였다.
③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기존의 사림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④ 균역법을 실시하여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해서 군포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⑤ 이조낭관이 행사하던 낭천권과 천거권을 박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