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군을 달래 화친을 맺었고 침략군은 물러갔다.
몽고와 1차 전쟁의 결과는 최우정권, 나아가 무신정권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을 만큼 충격적인 것으로 최우는 그 다음해인 1232년에 왕과 대다수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는 몽고와의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천도직후는 강화향교를 국자감으로 삼았고, 이후에는 새 국자감을 건설하여 그 명맥을 이어갔다. 혼란스런 시대상황 속에서도 국학의 명맥은 유지된 까닭은 국가직면 문제의 해결은 국자감과 같은 교육기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3. 몽고 간섭기
몽고 간섭기에 충렬왕은 너무 학
3) 강화도 천도 후 몽고의 2차 침략
고종 19년 2월 천도 문제 논의 강화도 천도의 강행(최우)
몽고에 대한 적대조치 노골화
고종 19년 8월 몽고의 침입
서북부 지역 점거 왕과 최우의 몽고 입조 , 개경환도 요구 고려의 거절
고종 28년 11월 오고타이 사망
1244년 구육의 칸 등극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 년 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
몽고족의 잦은 침략을 피해 고려 고종은 1231년 서울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를 감행.1270년 고려 원종 11년에 환도하기까지 39년간 6차례에 걸친 몽고의 끈질긴 침입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고,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려 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최초의 금속활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