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친구를 찾아가 추억을 논함이 실로 슬프다.
해를 넘겨 홀로 열반당에 누워 있으니
문 앞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고 창에는 문종이 마저 떨어졌구나.
화로에는 싸늘한 재만 있을 뿐, 자리엔 서리가 앉았네.
노승은 스스로 편안하게 지내는 방법을 갖고 있으니
팔고가 아무리 들끓어도 방해 받지
서기 660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절벽 아랫부분에 쓰인 ‘洛
무량사(無量寺, 현 충남 부여군 의산면)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59세(성종 14년)였으며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浮圖)가 남아 있다. 그는 유교와 불교에 걸치는 학자로서 사상서 저술은 「매월당집」의 문고(文稿)에 수록되어 있으며 불교관계 저술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묘법연
이상이 패도정치의 회포로 무너진 현실에서 방랑하며 방임적 삶을 살음.
31세 때 경주 금오산(金鰲山 )에 정착, 37세까지 좌절과 번민 속에서 고뇌에 찬 세월을 보낸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금오신화 창작.)
전국 방황하고 기행을 일삼다가 성종 24년 홍산의 무량사에서 말년의 생애를 마감 함.
표훈사는 당연히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미황사, 고창 선운사, 부안 내소사와 개암사, 서산 개심사, 부여 무량사와 보령 성주사터, 청도 운문사, 강진 무위사 및 백련사, 정선 정암사 등은 저자의 전작들을 통해 꼭 가볼 만한 사찰로 알고 있었지만 미처 가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