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부인이 된 거창 출신의 이현욱을 만나 같은 해에 재혼을 한다.
안타깝게도 임화 역시 일제의 탄압 끝에 전향을 하는데 일제 말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고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1944년까지 근무하며 [조선영화발달사] 집필을 한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
시들로 주로 반항의식, 파괴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제2시기는 계급의식에 입각한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들로서 <담-1927>(1927.11), <네거리의 순이>(1928.1), <우리오빠와 화로>(1928.2)등이 있다.
제3시기는 운명의 논리와 낭만의식이 지배하는 내면의 시들로 <세월>(1934.6),<한여름밤의 꿈>(1939.3)등 53편이 있다.
검거되었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남천, 김기진과 협의하여 카프의 해산을 결정한다. 그해 8월에는 요양을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 193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에 여기서 만난 지하련과 재혼했다. 1937년 학예사를 대리 경영했고, 〈사해공론〉·〈인문평론〉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문학적 업적은 단편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金裕貞이 문단에 등단하여 작품을 활발히 발표하던 때는 카프(KAPF)가 해체되고, 서구문학의 본격적인 수입과 함께 해외 문학파가 득세했고, 구인회(九人會)의 등장과 함께 문예이론의 전문화, 창작 기술의 세련성이 강조되었다. 유정의 구인회(九人會)활동시
볼 수 있다. 임화가 그의 실제작품에서 계급적 갈등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당파성, 전위성을 희석시킨 점은 비평을 통해서 그가 취한 이데올로기 일체주의와 모순된다. 그 이유는 정세악화에 따른 보호색 내지 연막전술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카프 해산 후에도 일제는 계급문학운동의 전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