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의 상황은 매우 암담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지의 폐간과 일본식 성명 강요, 황국 신민화 등을 통한 일제에 의한 탄압이 그 강도를 더해가면서 친일 문학이 아니면 작품을 발표하거나 문학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내선 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 아래 창씨개
문학’에 직결되지만, 그 방법과 정신이 삶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초월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모든 인간의 삶에서 본래적으로 부여된 운명을 발견한다고 할 때, 그것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해방 이전에 김동리가 발표한 <바위>, <무녀도>, <황토기> 등이 식민지 현실의 경험과
문학의 형성은 「무정」에서 시작되거나 혹은 1920년대로 늦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무정」=계몽주의=근대문학의 등식이 고정됨에 따라, 그 이전 시기 유학생 출신 신지식 층의 단편들은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실정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미숙성의 소치이거나 불완전
일제의 압제를 거부하고 만주, 간도등 광활한 대륙으로 가서 만선일보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여 우리글과 우리말을 살려 민족문학의 뿌리를 지키려 하였다. 특징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친일시
1939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제 어용 시들은 1941년에 이르면 전 문단에 확산된다. 1940년대의 일제
문학에서 민중에 대한 관심은 이미 카프의 프로 문학과 해방기 문단의 민족 문학론 등의 존재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70년대에 와서 민중이 중요한 소재로 떠오르게 된 것은 60년대 이래의 성장 위주의 근대화 정책이 초래한 사회 전반 구조적 모순의 심화, 이에 따른 민중 생존권의 위협, 노동자와 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