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가 없는 혼란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1966년 여름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갑자기 출현했던 홍위병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잇단 실각과 마오쩌둥의 절대권력 확립이라는 사태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
문화대혁명이 진행된 것이다.
1976년 1월, 13억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조우언라이(주은래周恩來)이 사망하고 그로 인해 제1차 천안문 사태 제1차 천안문 사태 : 조우언라이가 사망한 후 같은 해 4월 4일 청명절을 전후하여 그를 추도하는 행사가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사인방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난
중국을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유소기, 등소평을 비롯한 주요 ‘실권파’가 추방되고 건설의 단계에 들어가자 홍위병은 농촌으로 내려가 이 사람들 속에서 후에 민주화운동을 책임질 사람들을 배출한다. 이 시기에 각지의 통치기관으로서 ‘혁명적’ 군ㆍ대중ㆍ간부의 3결합의 ‘혁명위원회’가 설
중국의 정부와 경제를 모두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 혁명은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끝날 수 있었다. 그 후 개혁파가 중심을 잡으면서 덩샤오핑이 복권된 후에 서방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6년 급진주의 집단인 사인방마저 타도되고,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바로잡고 중국을 새롭게 건설한
문화혁명 때문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하였으며, 1974년에 복귀를 하지만 홍위병에 의해 큰아들이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에 복직하여 당 주석으로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경제정책 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