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몇 개 현에서는 문혁이후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문맹율이 41%나 되었다.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문맹문제도 부인해왔다. 이 결과는 자격있는 교사들이 문혁기간동안 제거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지구에서는 교사가 없어서 선발된 몇몇 학생들이 다음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책임졌다
중국공산당은 1962년 1월 ‘7000인 대회’ 개최를 개최하여, 지도부의 자아비판을 실시했고, 마오쩌둥 역시 대약진 운동과정에서 중앙이 범한 과오 인정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실무자들과 마오쩌둥의 의견은 달랐다. 마오쩌둥은 실패의 원인을 지방당 간부들의 착오와 자연재해, 소련의 지원 중단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우파에 대한 탄압과 우경이론에 대한 일소라는 기치를 내세운 좌경이론, 좌경실천을 야기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좌경이론과 좌경실천의 구호가 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사회 전반에 대한 변화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8차 당 대회가 끝난 2,3개월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여 중국 전체가 파괴됨.
[3] 지금은 많이 복구되었지만, 공산당에서조차 언급을 피할 정도로 역사적 상흔이 깊음.
[4] 따라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배경과 전개과정 및 영향을 살펴보려고 함.
Ⅱ. 문화대혁명의 발생 배경 및 원인
1. 흐루시초프의 등장과 중소 대립
[1] 흐
중국을 관광목적지로 했을 때 1994년 현재를 기준으로 한 거리저항도를 조사한 표이다. 구주지역에서 중국으로의 Inbound는 구주지역국가 공히 경제거리, 사회・문화적거리, 심리거리, 계량거리, 정치・외교적 거리, 시간거리 상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