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E. Lauterback의 {韓國美軍政史(1948)}를 중심으로 미군정이 해방 직후 야기한 실책과 정책의 난맥상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한편 이 분석에 있어서 북한의 소군정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여기에서는 전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고 대조적인 사례로서 비교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식 직위분류제를 도입함으로써 행정의 민주화를 기하려고 하였다. 즉, 이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일제식민통치하에서의 천황중심위계질서 관념을 불식시키고 능력과 인물본위의 민주적 인사행정을 발전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4. 입헌적 독제행정
미군정이 남한에서 민주화를 추진한 것은 사실
위원회도 참여한다.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도진순, 64쪽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의 계략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 28인 모두가 민주의원이 되면서 비상국민회의는 미군정의 자문위원단의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제 1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나자 미국무부에서는 민주의원의 용도폐기
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소집 요강 및 중앙인민위원회의 규정
(2) 민주주의민족전선 및 지방선거 행동강령의 규정안
(3) 미군정의 규정
(4) 미소공동위원회 결의 6호 질의에 대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답신
(5) 위 질의에 대한 북조선노동당 답신
(6) 위 질의에 대한 민전의 답신
(7) 남
한국군 장교들은 광주의 소요진압에 있어서 공수특전단이 처음에 동원된 것은 이 부대가 기동성을 보유하고 있고 또한 미군 휘하의 한미연합사령부(Combined Forces Command)의 작전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뒤 한국군부는 서울에 본거지를 두고 통상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