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조정의 관리들이 이념에 치중하여 오랑캐와는 화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를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다섯 가지의 근거를 들어 비판, 공격하고 있다. ①외국의 토성으로 중국의 지벌을 깔보는 것. ②한줌 작은 상투
일기체 부분에 자신의 심리 변화도 표현하였고 또 그 변화도 날짜가 지남에 따라 점차 바뀌면서 앞과 뒤가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김동석, 「열하일기의 서사적 구성과 그 특징」, 『한국실학연구』vol.9, 한국실학학회, 2005.
또한 『열하일기』는 전통적인 문학양식과 연암 박지원 나
열하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접해본 적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 문학 시간에 가끔 등장한 ‘일하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통해 열하일기의 전부를 보았다고 생각했고, 국사시간에 열심히 외운 실학자 ‘박지원’이라는 이름 석 자와 그가 주장한 ‘이용후생’, 그것이 우리가 아는
1. 들어가며
- ‘문체반정’의 원인으로 지목된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 박지원의 대표작인 『열하일기』는 그 작품성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시대적 풍자, 정치와 경제 그리고 종교와 문학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그의 독특한 문장력으로 인해 당시 조선 사회와 지성계에 상당한 영
열하를 여행하여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명작 기행문을 쓰게 된다. 그 후 50세에 선공감 감역 등 말직에 머물다가 의금부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1805년 69세의 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