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한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해 중국의 변방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음모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내 한국 전(前)근대사 연구의 권위자로 자리 잡은 인물인 레드야드 교수는 “고구려는 한국한테는 문화적 정통성의 문제이지만, 중국한테는 영토 주권의 정치적 문제이
1) 발해의 건국과정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으로 압송되었다. 당의 강제 사민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영주지역으로 압송되었는데 대조영의 집단도 그 가운데 속해 있었다.
696년 5월 거란족의 수령 이진충이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봉기하였다. 이진충은 조
정치적인 군장은 제사장의 성격이 짙었음을 말해준다. 이 단계에서 경주평야 일대의 여러 집단들은 강한 정치적·군사적인 결집력을 지니지 못하였고, 각 읍락(邑落)들에는 농업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었다.
이사금은 연맹체 내 유력 집단들의 장(干)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상황과 육두품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남쪽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들이 세운 발해가 북쪽에서 각각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며 공존하던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 문화적 역량을 더욱 키워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