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해의 건국과정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으로 압송되었다. 당의 강제 사민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영주지역으로 압송되었는데 대조영의 집단도 그 가운데 속해 있었다.
696년 5월 거란족의 수령 이진충이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봉기하였다. 이진충은 조
발해사 연구에 이용되는 자료들이 발해의 건국 시조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데에서 주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발해사 연구는 주로 발해의 건국과정, 그것도 건국시조인 대조영의 출신문제에 집중해 왔다. 이 문제가 바로 발해의 정체성을 밝힐
발해에 대하여서도 발해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는 사실, 그 건국자가 대조영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통일신라와 발해에 관하여 지금까지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이어져오고 있는데, 이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조선시대 후기부터 지속
과정에서 등장한 발해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추진하여 건국 직후인 700년경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러한 사정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보이는 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발해는 건국 직후에 대조영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품인 대아찬의 질
925년부터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런 시기에 발해의 중앙정부는 강력한 요나라의 등장으로 국가 존립이 위험에 처하자,여러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고려와 정략적 혼인을 하는등 외교적으로 노력을 하지만 막상 요의 침공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