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고구려에 있어서 그 지배하의 말갈족은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변방민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맥족과 다른 생활양식을 가진 이들 말갈족에 대해서는 그들의 존재양상에 걸맞은 통치를 하였다.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의 출자와 관련하여 일반
대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 바로 옆에 위치하고, 바다 건너 가까운 곳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작고 큰 문제로 우리들을 괴롭혀 왔다. 비단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들은 우리와 반목하면서 역사를 일구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훌륭
발해국의 역사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구명된 것이 뚜렷하지 않다. 발해의 역사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 만한 기전체, 편년체와 같은 체계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 발해사 연구는 옛 발해의 권역인 중국, 북한, 러시아 등지에서부터 발해 유적 발굴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하지만 당은 매초성전투(675)와 기벌포전투(676)에서 신라에게 패한 후, 안동도후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다. 이로써 당은 패수 이남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부터 당의 고구려지역에 대한 지배는 요동반도에 한정되었다.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당의 외교적 회유에 발해는 비록 당과의 대립 속에서 건국하였지만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계속 당과 대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선진문물은 발해의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돌궐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강대한국가였으나 유목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