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4. 남조선 단독선거 불인정
-4김회담
북한의 송전계속, 연백 수리조합 개방에 동의 받음
Ⅱ. 남북협상이후 통일운동세력
제1차 남북협상에서 김구?김규식, 김일성?김두봉 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통일독립이라는 최종목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반면
1945 대한민국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
미군과 국내진입작전 준비. 신탁통치 반대 운동 주도
1948 남북한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연석회의 참여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9 6. 26일 경교장에서 친일파 반통일 세력에 의해 서거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7년 국무회의의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48년 1월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를 위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
남북협상에 대해 자주정부 수립의 문제가 아니라 남로당‧북로당 모략에 빠져 조선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비난을 하고 있다. 김구와 김규식은 단일정부 수립론이 남한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정치적 타개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통일정부 수립의 대상을 남한내에서 찾지 아니
김구가 임시정부 명의로 정부 기능을 수행하려고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미군정은 김구세력을 정국 운용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나 김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임정추대 운동, 2차 미, 소 공동위원회 재개에서 다시 반탁운동 주도, 남북협상 추진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