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4. 남조선 단독선거 불인정
-4김회담
북한의 송전계속, 연백 수리조합 개방에 동의 받음
Ⅱ. 남북협상이후 통일운동세력
제1차 남북협상에서 김구?김규식, 김일성?김두봉 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통일독립이라는 최종목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반면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7년 국무회의의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48년 1월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를 위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
통일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 지속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최근 남북간의 화해가 일정하게 추진되면서, 그간 외면하였던 김구와 임정 요인들의 통일운동을 주목하게 된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거센 풍랑 속에서 민족 자주의 원칙은 소홀하게 취급될 위험이 있다. 분
운동의 큰 뜻에 동의한 정치세력들 간의 통일전선 요구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을 상실한 친일세력들과 소작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지주세력들이 월남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북 지역에서는 좌우가 함께하는 건국운
백범기념관을 그들이 배경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백범김구 선생은 우리의 범 민족적 대표자로서 인식되어 많은 추앙을 받고 있지만, 실상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치고, 우리나라의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년을 다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