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이같이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고구려도 보장왕 25년(666)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세 아들의 불화 등 내부에서의 분열로 결국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당함.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만
무리를 지었다. 한산에 이른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 명의 신하들이 말하였다.
“이 강 남쪽 땅을 보면 북으로는 한강을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이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
백제를 다시 지키기 위해 움직이려는 망국의 사람 흑치상지를 백제부흥운동과 관련 하여 서술 할 것이며, 향후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기록도 알아 볼 것이다.
2 백제의 멸망과 외교적 고립
1) 7세기 국외 동맹체제
당시 한반도에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뒤 당나라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660년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 김유신의 5만 병력과 합세하였다. 계백의 용전도 효과 없이 사비성이 함락된 후 4년간의 백제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백제는 망하였다.
(3) 고구려 멸망(668년)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를 넘어 멀리 시라무렌 유역까지, 북쪽은 북부여의 옛 땅인 길림 농안 등 북만주로부터 흥안령 산맥 남부까지, 동쪽은 두만강유역의 책성(柵城)으로부터 연해주 일원까지, 남쪽은 한강유역에 이르는 지역을 통할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5˜6세기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