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7세기 후반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의 하나이다. 신라와 당의 연합에 의한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 676년 당 세력의 축출과 698년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의 건국 등 일련의 연대기적 사실이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후대의 역사인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또는 ‘
바가 없었다. 조선역사가 출간된 바로 이듬해, 당시 일본에서 좌익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이북만은 칼 마르크스의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도의 동양적 형태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통일신라시대 이후를 봉건제사회로 규정하는 논문을 일본의 역사과학(1~4)에 발표했다. 당시 유물사관은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번쯤은 신라의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국사교과서의 내용처럼 “한계성은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국한된 영토에 대한 아쉬움에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한다" 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
삼국이 모두 군사력에 의한 대외 정복전쟁을 강력히 추진시킨 정복국가라는 점에서 삼국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 같은 상황 속에 세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는 적대적인 감정이 깊이 싹트면서 지역감정이 자라나게 되었다.
c.통일신라시대
삼국통일 후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