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길도 찾고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서울로 가게 되었다.
뒷동산에서 장필성을 만나다.
이팔청춘의 나이인 채봉은 여종 취향과 함께 뒤뜰 동산에 올라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과 김 진사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그러던 중 서쪽 담장에서 한 소년이 담장 안을 엿보는 것을 발견
벼슬아치들이 평상시 한가로이 거할 때 입음.
포의 양식과 비슷하며 위아래가 붙은 것으로
포의 안에 입거나 여름철 집에서 입던 속옷으로 볼 수 있음.
*고: 곤의 밑에 입는 아랫바지로 고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바지 양식.
(1)진나라
*포는 한족의 복식에 속한 옛 제도로 진시황
벼슬길 시작되다
28세 때(己酉年, 1789) 봄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의 벼슬생활은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1800)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 후반기 12년 동안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신들의 품의로 규장각(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
1. 이규보의 생애
이규보는 1168년(고려 의종 22년) 12월 16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氐),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綬), 벼슬은 호부낭중(戶部郎中)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머니는 금양(金壤, 지금의 강원도 통천) 김씨이다. 외조
)·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