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 (순조 재위 11년)에 일어난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비교적 큰 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이때 재위하고 있던 국왕의 묘호가 순조가 된 것은 홍경래의 난 진압의 성공에 기인한다. 그만큼 대규모 봉기로 조선왕조에 커다란 충격
Ⅰ.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배경
홍경래의 난은 1811년 12월 18일 (순조 재위 11년)에 일어난 것으로 조선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비교적 큰 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이때 재위하고 있던 국왕의 묘호가 순조가 된 것은 홍경래의 난 진압의 성공에 기인한다. 그만큼 대규모 봉기로 조선왕조에 커다란 충격
물론 문(文)으로 가문을 빛내는 인물들을 조사하는 것도 좋겠거니와, 나의 조상들이 누가 있나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과연 공부로, 과거시험으로 이름을 떨친 분들이 아닌 역사의 한 흐름에서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나 보던 중, 홍경래(洪景來)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홍경래를 모르는
3) 봉기
순조 11년 12월에 이르러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의 일선 졸병들은 이들 광산 노동자층으로 구성되었고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여러 다양한 업종과 향임들도 참가하였다. 가산 박천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이나 품삯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였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 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 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