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홍경래 등은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에 봉기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가산, 박천, 안주의 방향과 정주, 곽산, 선천, 철산을 거쳐 의주로 가는 북쪽 방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 공략하기로 하였다. 남진군의 지휘는 홍경래와
1. 서론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제유(諸儒)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Ⅰ. 머리말
조선 후기, 즉 17-19세기에 이르러 한국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사회적인 면에서 신분제의 동요, 신분제와 맞물려 중세사회의 물질적인 토대를 이루었던 경제 구조의 변화, 유학자들의 주자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이반, 정치적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불교의 미륵신앙과 정감록사상이 번져 나간다.
II. 본론
1. 개항 이전의 민중운동
1) 홍경래의 난
(1) 홍경래홍경래는 18세기 말 평안도 출신으로 체구는 작았지만 영특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외삼촌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신분은 몰락양반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