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북벌론의 시대적 배경
북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북벌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찾으면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유는 북벌론의 논리적 토대가 ‘존명사상(尊明思想)’에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지원은
북벌론이 크게 대두되었고, 그와 대비되는 북학론도 나타나 미약하게나마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1. 명분론
① 화이론
- 중화와 이적(오랑캐)의 구분을 내용으로 하는 화이분별의 관념에서 이적과 대비되는 중화의 실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역적 개념, 종족적 개념, 문화적
Ⅰ. 17C(17세기)의 북벌론
1. 북벌론의 대두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함으로써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반청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병자호란에 이어서 청은 1644년 명나라마저 정복함으로써 중원의 새로운 정치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국 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선
Ⅰ. 들어가며
병자호란 직후 북벌론은 대청관계에 주체적으로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왕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는 효종대였다. 당시 효종이 북벌론을 국책으로 적극 추진한 이유는 인조반정에 의한 왕위계승에 정통성 결여라는 문제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위계승의 정
북벌결정후에도 북벌보다는 혁명근거지 광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중공내부의 의견차를 드러냈다.이러한 내부사정이 있었으면서도 국민정부가 북벌에 나섰던 것은 전국 정세의 간박화에 있었다. 죽 북방에서는 곽송형의 반란후 '反赤' 통일전선이 형성되어 혁명의 영향은 저하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