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한 성업에 몸을 바칠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휴전협정당시 북측대표로 나왔던 한 장성의 기자회견록의 일부는 더욱 깊이 있는 통찰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 인간은 침략자의 가혹한 만행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김일성 동지가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듬해인 1927년, 김일성은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진보적인 교사들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그 덕분에 1929년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과 같이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제2의 제3의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할 수 없다. 계속하여 북한의 전략에 놀아나게 될 것이다. 이렇듯 한 가지 관점에서만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은 판단으로 보인다.
북한정부는 “천안함 조사는 날조된 것이며 사건 해결의 관건은 피해 당사자인 북한이 확인하는 데에 있다”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4일 천안함 사건에 대해 국제사회 차원의 대응 조치를 논의해 줄 것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공식 요청한 상태이다.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 남북간의 외
북한의 권력구조, 대내정치, 대남정책 등은 기존 노선에서 좀처럼 변화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즉, 북한의 권력구조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세습체제가 굳어져 갈 뿐, 아직재편의 조짐이 실제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조선’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정치구호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