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일처일부제의 규범을 잘 지키고 산다면 우리는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행동한 선은 사회적 규범의 틀로 확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 귀감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두 종류의 선이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자문
선수범과 그러한 군주에 대한 백성의 자발적 복종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정치이다. 또한 예로써 백성들의 욕망의 한계를 설정하여 각자의 본분을 지키고 겸양을 발휘하여 사회적 안정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백성을 정치제도나 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그들을 질서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엄밀성만이 추구되었다. 이를 통해 중국의 주자학이 한국의 성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학사상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이황과 이이의 비교 분석
1)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시대의 학자·문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시호는 문순(文
이황이 주목할 만한 교육사상가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황의 교육사상은 성리학적 교육철학 체계에서 크게 벗어나기 않으면서 그것을 더욱 정교화하고 심화시킨 결과인 것이다.
※ 조선성리학의 두 가지 입장
학파
지역
특징
선구자
대표자
후계자
주리파
(도덕적원리)
영남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