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도 이 직하(임치)에서 논진을 편 일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을 했다. 맹자가 가졌던 일련의 논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性)에 대한 선악을 말할 수 없다는 고자와의 응수이다. 또 차별없는 사랑을 주장한 묵적의 겸애설, 철저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의 위아설을 모두 극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하며, 백성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근심한다. 이처럼 성인의 몸에 충만한 것이 ‘측은지심’이다. 그러므로 ‘인심을 미루어 인정을 실행’(推仁心 行仁政)할 수 있다.
1)인정학설의 이론적 기초 -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공자-“타고난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후천적인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은 모여 살기는 했으나 정치체가 구성되지 않았기에 인간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홉스와 로크가 개인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적 권리를 일부 포기․양도함으로써 통치자를 내세워 안정을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
사람은 남을 지배하게 되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남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착취계급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종합해보면 맹자의 윤리학설은 선명한 당파성과 봉건사상적 특색을 띠고 있다. 맹자는 효도를 최우선하고 내면의 반성을 중시하는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사맹학파가 이로부터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