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정치․사상과 금서
제2장 불교와 도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유교가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확정되었다. 지방 중소지주층으로서의 신진사대부에게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담보할 권력 창출이 고려의 문벌체제와 결합된 불교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정치, 교육, 윤리적인 측면에서 활발히 기능해 왔다. 하지만 해방 이후 위정자들의 무지와 편견으로 전통사상이 홀대를 받아 왔고, 유학도 케케묵은 골동품으로 인식되어 왔다. 더욱이 서구문화의 대세 앞에 유학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꼴이 되어버린 것
Ⅳ. 화서 이항로의 철학사상조선 후기에는 외형적으로 도학(주자학)의 정통이 유지되었으나, 이미 다양한 사상조류의 등장과 도전으로 사상적 다원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말의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사회는 한층 더 격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동요를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몇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가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사대(事大)는 사친(事親)이나 사군(事君)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효나 충은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며 모두 사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효로써 하되, 부모는 자식을 자애로써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