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이 성립하게 된 배경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온 사림의 향촌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사회에 있어서 자기세력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일찍부터 사창제(社倉制)·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개별적으로 시행하여왔다. 특히 정계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이를 공식화하여 국가정책으
소백산 자락 영귀봉 아래 위치한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고려말 회헌 안향 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 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소인 사실을 감안하면, 서원 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
사액의 경우도 서원이 465개중 208개가 사액을 받아 전체 사액률이 45%에 이르는데, 사우는 504개 중 71개로 고작 14%에 머물고 있다. 제향된 인물의 등과(登科) 여부를 살펴보아도 양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과출신자가 사우는 101명이나 되는 데 비하여 서원은 9명에 불과하다. 충절인 중에는 무인이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