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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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원書院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서원(書院)
1) 서원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서원이 처음 건립된 것은 1543년(중종 38)이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말 학자 안향(安珣)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효시이다. 그는 영남감사(嶺南監司)의 물질적 지원과 지방유지의 도움으로 서적과 학전(學田)을 구입하고, 노비 빚 원속(院屬)올 확충하는 등 재정적 기반을마련하였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祠廟)가 위주였다.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풍기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서원을 공인화하고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소인 사실을 감안하면, 서원 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외면적인 확대와 아울러 내용 면에서의 충실에도 유의하였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尊贄處)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 쳬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에서의 학습활동과 운영방안을 규정하였다.
2) 서원의 전개
조선조 서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의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그리고 영조 17년 이후의 서원철폐 및 쇠퇴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초창기
초창기에 건립된 서원운 19개소이다. 초창기임에도불구하고 사액된 곳이 4개 처나 되는 것은 서원이 이 시기에 이미 관설에 준하는 교학기구로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 보급운동이 거둔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척신세력으로서도 관학의 쇠퇴를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그 대체기구로서 서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도 있었다. 그리고, 제향인물인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최충(崔沖)최유길(崔惟吉) 등이 사림 이전의 고려시대 인물이었던 관계로 척신세력의 반발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서원의 설립이 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 면에 있어서도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규정으로서, 이황의 「이산서원원규(伊山寶院院規)」를 기본으로 서원별로 원규가 작성되었으며, 이에 의한 강학 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이래 향촌유지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기반 구축과 원속(院屬) 노비 등의 확보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서원전(書院田)어물(魚物)소금 등 현물 조달체제의 영속화를 도모하려 했다. 명종말~선조초 사림의 활발한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재정을 밑바탕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2) 발전기
서원은 선조대에 들어와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만 60여 개 소를 넘었으며,22개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 뒤 현종 때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전국적으로 193개소가 설립되었다.
서원의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사림의 향촌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졌으며, 적극적인 서원 보급운등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요인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시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붕당은 정쟁(政爭)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당파형성에 학연(學緣)이 작용하는 바는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조직과 세력의 확장에 중추적인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각 당파에서는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지역 사림과 유대를 맺고, 이를 자파(自派)의 우익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 향촌의 사림으로서는 서원을 통하여 중앙관료와의 유대를 맺음으로써 의사전달과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처럼 서원 건립을 놓고 양자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원의 발전은 양적인 증가에서뿐만 아니라, 기능의 확대라는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 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사림간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취회소(聚會所)로서의 구실과, 특히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운영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하였다. 실례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향촌방어를 목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또 그것을 일으키기 위한 사림의 발의와 조직의 편성에 서원이 그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심지어 향풍(鄕風)올 문란하게 한 자에 대하여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는 향촌사림의 사적인 제재조처까지 단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