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祠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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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우祠宇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우(祠宇)
1) 사우의 전개
우리나라에 사우(祠宇)사당(祠堂) 제도가 유입되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으나 사우의 건립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말 주자학의 도입 이후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말 이후 유교문화의 확신이 사우 건립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던 사실은 향촌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설립되었던 기자사(箕子祠)와 단군사(檀君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이후 기자사의 건립이 확산된 것은, 당시 융성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고려가 주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든 기자 조선의 후예이며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주장하려는 유학자들의 중국 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조 사회에 유교이념이 점차 정착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국기에 공헌이 있으며 충의를 다한 공신 명현들에 대하여 추존 운동이 적극 전개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민간에 의한 사우 건립의 커다란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세종 8년에는 상국시조를 모실 의사(義祠)를 세울 것을 하명하였고, 태종 10년에는 사간원(司諫院)이 올린 시무책에 문익점(文益漸)의 공로를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향리에 사당을 세워 봉사케 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조에는 길재(吉再)의 학덕을 기려 그의 고향인 선산에 길재사(吉再祠)가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사우 설립의 경향은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발흥과 더불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커다란 변모를 보이면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 사우와 서원
조선조의 서원은 선현(先賢)선사(先師)를 봉사하는 사(祠)와 사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서원의 태동단계에서는 서원과 사우의 존립 목적과 기능이 크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우는 처음부터 사현(祀賢)과 풍화(風化)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충절인의 공덕을 기리는 보본숭현(報本崇賢)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그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한 보답과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의 교회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한편, 서원 설립의 일차적 목적은 인재양성과 강학(講學) 기능에 있었다. 선현과 선사에 대한 제향의식을 담당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원과 사우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의 차이가 있었음은 향사인(鄕祀人)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사우에 제향되는 인물은 행의(行誼)와 충절, 효열(孝烈)이 존숭 대상이었던 것에 반하여, 서원에 향사되는 인물은 도덕과 학문이 사표가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원의 향사 대상자는 행의와 충절만으로는 미흡하며, 도학연원(道學淵源), 학문종사(學問宗師), 공적위국(功竇爲國) 등에 합당하여야 선택되었다. 이에 따라서 서원이 사우보다 높은 비율을 접하고 있는 향사의 명목은 가향(家鄕), 우거(寓居), 졸지(卒地), 적거(謫居) 등인데, 사우가 앞서는 명목은 부임지, 순절지(殉節地) 등이다. 이는 지방수렴을 제향한 생사당(生詞堂) 등이 사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무신 등을 다수 제향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지역적인 특성과 연관지어 살펴보면,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도는 가향우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명신과 유현을 많이 배출한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반면 유배지가 많은 전라도함경도 등은 적거(謫居)가 많은데, 진도 봉암사우(鳳岩祠宇)의 경우는 그곳에 유배되었던 인물 8인만을 모아 제향하고 있다. 이북 4도에서 관원의 부임과 선정을 추모하는 사우가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명신과 유현을 적게 배출한 이들 지역으로서는 그 곳을 거쳐간 인물들이라도 배향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별사(別詞)에는 이계손(李繼孫) 등 6명의 함경감사 출신을, 평양의 생사당(生祠堂)에서는 이세백(李世白) 등 5명의 평안감사만을 제향하고 있다. 순절지는 양난의 격전지였던 전라도경상도함경도평안도의 4도에서 그 비중이 높은데, 진주 충민사(忠愍祠)의 경우 진주 전투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 등 25인을 제향하고 있다.
서원과 사우의 비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우는 서원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파악되어져 왔다. 사액의 경우도 서원이 465개중 208개가 사액을 받아 전체 사액률이 45%에 이르는데, 사우는 504개 중 71개로 고작 14%에 머물고 있다. 제향된 인물의 등과(登科) 여부를 살펴보아도 양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과출신자가 사우는 101명이나 되는 데 비하여 서원은 9명에 불과하다. 충절인 중에는 무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문신학자 출신에 비하여 무인은 서원에 제향되기가 지극히 어려웠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이 남설되던 17, l8세기에 들어서는 이같은 양자의 차이점도 모호하게 되었다. 경종 년간의 이명언(李明彦)의 계사에 이미 서원과 사우간에는 아무런 차등이 없음을 경계한 내용이 보인다. 당시 경상좌도암행어사의 복명(復命) 중에도 서원과 사우가 섞여 있어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정에서조차 구별을 두지 않고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양자간에 구별이 점차 없어진 이유의 하나는 시기가 경과할수록 서원과 사우에 제향하는 인물에 구별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혈연과 지연 등을 중심으로 한 무원칙한 인물의 선정은 향사자의 자격과 질의 저하를 공히 초래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17, 18세기에 있어서 서원의 기능 변화가 지적된다. 인재양성과 강학기능이 일차적이었던 서원이 사현(祀賢) 위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서 종래사우로 불러야 마땅 할 것도 서원이라 칭해지며 양자의 혼효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한편, 사우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당(祠堂)이 혼용되고 있는데, 실제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당은 사우와 유사하나 주로 사대부가를 비롯한 일반 민가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집을 말한다. 사우는 학문이나 덕행 무공(武功)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하는 곳으로, 배향인물의 연고지와 백성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하며, 왕실의 것은 종묘(宗廟)라 한다.
3)사우의 건립주체
사우의 건립 주체는 대체로 제향자와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닌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향촌 사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사족집단이었다. 사우의 건립은 대체로 후손에 의한 경우, 문인에 의한 경우, 향인에 의한 경우로 나눌 수 있으며,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후손에 의하여 설립되는 경우는, 그 동기가 추로 선조숭배(先組崇拜)와 보족(保族)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예로 청주의 노씨(盧氏) 일문을 모시는 예화당사우(隷華堂祠字)나 성주의 경산이씨(京山李氏)를 모시는 안봉영당(安峰影堂) 등을 들 수 있다. 일족이 주체가 되어 사우를 건립하는 경우에는 동족 중의 저명인을 향사하고 종중(宗中)에 통문을 돌려 공동출자의 형식으로 기금을 마련하였다. 2, 3개의 문중이 협력하여 건립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의 박팽년(朴彭年)가문에서와 같이 애초에는 족인을 병향(享)하는 가묘를 건립하였다가 후대에 사림의 동의를 얻어 사우로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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