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祠宇)
1) 사우의 전개
우리나라에 사우(祠宇)사당(祠堂) 제도가 유입되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으나 사우의 건립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말 주자학의 도입 이후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말 이후 유교문화의 확신이 사우 건립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던 사실은 향촌사회 곳곳에 광범위하
사우(祠宇)는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뮬 모셔두고 제향하는 곳으로 인간의 보편적 의지인 선조와 선현의 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향교는 1900년에 창설된 오천향교(糞Jll槨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있으며, 서원은 조선조 전시기에 걸쳐 8도에 4
사우(祠宇)와 함께 남산공원에 이전되어 보존된다. 비석의 높이는 1.73m이고, 폭은 0.64m로서 비록 비문(碑文)이 많이 마멸된 형편에 있으나 귀부(龜趺)등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면 3간, 옆면 2간의 비각(碑閣)에 보존 관리되는 정열사비는 기념물 48호이다. 김천일(1537~1593)은 1592년(선조 25) 임진
사우, 정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유교건축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향교와 서원을 통하여 한국의 유교건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향교
1) 향교의 역사
향교는 주로 조선시대 지방의 儒風을 진작시키고 아울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관학을 의미
Ⅰ. 녹동서원
영암에서 최초로 건립되었고 또 영암 유일의 사액서원인 녹동서원은 후일 영암에 유배되어 온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농암 김창협(農岩 金昌協) 부자가 추배되기는 하였으나 본래는 연촌 최덕지를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존양사라는 전주최씨 가문의 문중사우였다. 즉 녹동서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