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배해왔던 유교에 대해서 문제점등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서민계급이 점차로 진출하면서 서민과 양반을 동일한 인격체로 보려는 노력이 보이게 된 것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바로 그 예로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민중들의 의식변화로 인하여 조선사회의 모순이 점차 들어 나게 되었고,
계급은 세속적ㆍ독점적 소수 집권층인 ‘벌열(閥閱)’과 몰락한 실권층인 ‘사(士)’계층으로 분화되어 갔다. 또한 조선후기의 사회ㆍ경제적 변화로, 농ㆍ공ㆍ상민의 수직적 신분 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대토지를 소유한 부농층과 소토지 소유의 소작농, 농토가 없어 도시로
이유로 해서 기녀들은 하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시대의 “패션의식적”사회집단으로서 대중으로부터 주목받고 대중의 기호를 장악하며, 그들의 복식행동은 대중으로부터 강한 수용을 받게 되면서 대중의 의복 행동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는 유행선도자 (Fashion leader)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재의 봉건적인 남녀차별과 일제시대의 식민지적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소작농가에 대한 수탈의 강화로 인해 여성의 지위는 더욱더 억압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즉 민족적 억압에 계급적 억압마저 더해지고 여전히 성적 억압으로 인하여 조선시대보다 더 억압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조선후기 회화는 사진이 없던 당시의 시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기록화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 소재의 일상성은 미시사나 생활문화사에서 활용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대한 역사, 사회, 문화에 있어서 이루어진 연구들이 많이 있으며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