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990년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매국노 이완용의 증손자 윤형씨가 이완용이 친일매국의 대가로 받은 은사금으로 구입해 소유했던 땅 찾기에 나섰다. 윤형씨는 1990년 7월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내, 지난 1992년 11월 1심에서 승소해 소유권을 되찾았으며, 1997년 7월 서
많은 글이나 사람들은 '친일파'의 유래를 갑신정변 단계의 개화파에서부터 끌어온다. 갑신정변 주체인 김옥균 등의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과 결론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판단해보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란 용어는 '외세와의 친연성을
론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통설이 되어버린 다음에 그 내용을 알아도 된다. 그렇다면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에 맞는 지식생산품을 만들어내는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생산품을 구입하는 일반 서민들과 같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소비자이면서도 자신은
론(尊王攘夷論)을 일제히 내세우게 되었으며, 번의 단위를 넘어 전국민적 통일을 목표로 삼는 하급무사나 시민계급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유력 웅번의 영주층들은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주창하게 되었다. 공무합체운동을 추진하였던 사쯔마(薩摩)번과 존왕양이론을 번론(藩論)으로 정한 죠슈(長州)
론 등의 요인에 따라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등으로 그 방식을 바꾸어나갔다.
1930년대는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극단적인 측면에까지 이르렀던 시점이었다.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상대적으로 자본이 취약했던 일본 역시 경제적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우경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