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향가와 고려의 속요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향가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으로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민간전승과 국가적 전승으로 꾸준히 이어졌고, 이를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친 결과가 속요 처용가로써 남아있다는 추측을 할
김부식은『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당시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 대신 당(唐)ㆍ송(宋)에서 발달한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였다. 고문체는 문장에서 중복되는 수식어를 쓰지 않아 문장이 간결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쓰는 효과가 있는 문체여서 역사 서술을 하는데
고려 후기의 역사서들과 비교․분석을 하면서, 삼국사기의 특징을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이자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는 점’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그 편찬자인 김부식에 대해서도 다루
삼국사기의 소루함이 사료의 부족이 아니라 김부식의 철저한 사대주의사관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김부식은 삼국을 중국 제후국의 지위로 파악했다. 진덕여왕 4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 비판한 사론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신라를 포함한 고구려, 백제는 중국에 신속하고 있다고 보고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라는 의식 역시 높아가게 되었다.
12세기 말 이후 고려는 약 100년간 무인집권 시대를 맞이한다. 무인반란 자체가 문인 유학자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것인 만큼 유학적 바탕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의 역사인식은 무인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 유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