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귀족출신의 이찬 칠숙,아찬 석품의 모반과 실패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이를 알아
차리고 칠숙을 잡아 그를 동쪽 시장에서 목베고 구족(九族)까지 멸했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보고자 하여, 낮에
고구려나 신라 등의 국가와 같이 여러 지역의 족장들 간의 연합과 연맹에 의하여 국가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어느 경우에도 완전한 정복자나 전제권을 가진 왕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토착세력을 인정해야 하거나 연맹체로서의 성격을 유지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신라에서 교육이 행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학교교육과 같은 형식 교육은 없었다 할지라도 신라 고유의 교육적 전통을 수립한 화랑도 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와 논리서를 중심으로 하였고 화랑도에 관한 학설을 종합하여 신라인의 투철한 화랑정신과 그
백제계의 분국이, 동북쪽에는 신라계의 분국이, 동쪽에는 고구려의 분국이 위치하였고, 동쪽으로 대화정권(倭)이 위치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백제군사령부설 - 천관우는 가야사의 복원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선행시켰다. 일본서기의 임나관련사료 중 일본이 주체로 묘
신라 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신라사에 있어서 화랑도(花郞道) 또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화랑도(花郞徒)는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그 사상은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