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이므로, 근대 태동기인 조선 후기에 먼저 상업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17세기 이래로 농업 생산이 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증가를 가져왔고, 여러 가지의 부세와 소작료의 금납화는 화폐의 유통을 가져왔다. 또한 여기에 농
예속되어 제례적교화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예술활동이 이제는 개성적이고 창발적인 시정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예술사를 이끌어간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서민’이란 어떤 집단을 말하는가? 이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시상인이나 부민 등 중세 해체를 기반
상인은 전국 각지에 松房(송방)을 설치
鎖國主義政策(쇄국주의정책)으로 민간상인들 外國貿易(외국무역) 일체 금지
억상 정책으로 국내 상업 위축
인삼 무역과 홍삼의 밀무역,송방의 활용으로 국내 상업 성행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商人郡(상인군)으로 발전
조선초기의 개성상업
개경 시전의
상업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성상인은 전국 각지에 松房을 설치하여 주단과 포목 등을 판매하였는데 송방은 보부상의 據點이 되었다. 당시 약 1만명으로 추정되는 개성상인이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行商을 하였으며, 송방은 정보교환과 상품공급 장소 및 보관소로 이용되었다.
개성
조선으로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농업이 최우선이였기 때문에 상인에 의한 시장발달도 크게 이루어지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육의전과 장시를 두어 어느 정도의 상업활동은 허락을 하였다. 한양을 비롯한 도시에는 시전과 같은 큰 상점을 두어 그 지역의 상업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