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을 손꼽겠다.
특히 요즘처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학문이라는 것이 어느새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한 출세의 수단 내지는 물질적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가 학자로서 지니고 있는 절개와 기풍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가운
2) 뉴욕타임즈 독도광고 기재 조선일보, 2009.8.31자 기사 참조.
서경덕 교수의 이번 도전은 그가 2005년 2월 쯤 뉴욕에 있을 때 CNN 뉴스를 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뉴스는 일본 시마네 현이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고,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선포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에 대한 자료는 많으나, 순수하게 과학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동양에서는 과학이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시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과학관이 확립되지 못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서경덕과 홍대용을 중심으로 그들의 과학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었다. 벽계수와 지족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다. 하얀 속치마 저고
서경덕
①호는 복재이며 당성사람이다.
②18세 때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에 이름.
③유기론 주장하고 ‘귀신사생론’이나 ‘물질 불멸론’은 사색을 통하여 얻은 결과이다.
④교육목적 : 격물과 궁리를 실천하는 것에 둠
⑤교육방법 : 자학자득을 공부의 묘방으로 함, 기의, 파의를 학문의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