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품들을 해체해 석굴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런 총독부의 몰 역사적 행동은 해방 후 우리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 석굴 천장에 빗물 방지를 이유로 다시 시멘트가 칠해지고 확신할 수 없는 고증과 습기 방지라는 이유로 전실에 목조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석불 보호 차원에
석불사로 칭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있다. 대부분 보살상인 이 감불좌상은 본존불의 바로 전방과 그 후방인 십일면관음상의 상면만을 피하고 그 나머지 벽면에 배치되어 하늘과 땅과의 중간에서 이 석굴의 영광과 장엄을 찬미하고 환희하는 것 같다. 조각 또한 주위의 벽에 있는 다른 여러 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을 보면 지붕돌의 끄트머리를 보면 위로 치켜올라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붕돌의 낙수면 끝을 사선으로 내려친 것으로 끝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탑의 2층 탑신>
<그랭이기법의 기단부>
석가탑은 평평하게 고른 땅 위에 서 있지 않고 울퉁불
불교미술의 정수로 이야기되는 불국사(佛國寺)가 창건되고 안압지(雁鴨池)와 석굴암(石窟庵)이 조영되며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해서 범종(梵鐘)․석등(石燈)․석부도(石浮屠)․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 등에 있어서도 우수한 것이 많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조각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