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소오세키는 자연주의 문예사조가 만연한 1910년대 문단에서 그러한 자연주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문학 활동을 해나갔다. 그리고 소오세키는 성실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문하생이나 문학 동료들에게 존경받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매주 목요일 3시를 면회시간으로 지정할 정
세키슈]에 이르기까지 같은 점을 말할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본처럼 한시대의 문화가 한 도시에 집중되지 않았다. 대륙의 문인은 온 나라를 여행하며 여러 지방의 풍물을 읊고 있다. 杜甫의 보기에서 전형을 볼 수 있는 것처럼 , 당나라시인은 그 음회를 반드시 장안거리에서 얻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싫어지는 일조차 있었다네. –선생과 유서12
숙부에 의해 배신당한 선생은 소송을 걸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학업에도 지장이 간다는 이유로 포기한다. 대신 숙부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로써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두 증오하기로 한 선생은 이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공산주의와 실제로 경험한 공산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좌익 정당 내에서의 치사스런 권력 다툼은 너무나 추악했다. 결국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한 오웰에게 남은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뿐이었다. 이러한 스페인에서의 경
아버지가 화를 내고 소설을 쓰는 놈은, 나가 죽어라(くたばってしまえ)라고 야단친 것에서, 그것을 그대로 필명으로 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조적인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문학은 남자 일생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메이의 일면이 이 후타바테이 시메이라는 필명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