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 관계되는 서적을 많이 구해오고, 최부 등이 주희의 사서집주 등을 전파함은 물론, 과거에서까지 그것을 채택케 됨으로써, 성리학의 본격적인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뒤이어 이제현,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및 정도전과 권근 등 고려말 향리 출신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계속 익히고
그러나 조선 왕조에 있어서 교육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이 실생활의 분비보다 수기면을 강조한 사음 중심의 교육과 공리공담의 이기설, 이기호발설이나 사단 칠정론에 편중하여 실사실물의 학문을 경시한 것 등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18세기 조선사회에는 실지 사정에 입각한 실제적 사고를 세우기
명종때에는 불경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처벌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승려 보우가 처형되면서 불교는 왕실불교의 모습조차 상실한 채 민간신앙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를 포함한 ‘이단’ 사상이나 종교는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대항할 만한 위치를 상실하였다.
이념이 지배적으로 관철되는 측면을 본다면 대상이 되는 향민들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러 가지 측면을 살펴보는 것이 향약에 대한 총체적 측면을 분석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이런 조선시대의 향약이 성립되는 과정과 특성 그리고 정치
조선시대에 사(士), 즉 사대부들 다음으로 중시되었던 것이 농(農), 즉 농업과 농민이었다. 또한 유교에서도 인간의 근본이 토지라고 주창하고 있다. 금장태, 「유교의 인간이해와 타종교와의 만남」,『儒敎思想硏究』, Vol.3 No.1 [1988], 397-416면. 이 논문에 의하면 유교에서는 땅을 물질적 자연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