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파’ 논쟁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이 두 사극의 공통점은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모두 한번 이상 조광조와의 대립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배울 때 다루지 않았던 소격서혁파논쟁을 이 두 사극에서는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에
혁파를 주장하여 성종 2년 간경도감이 혁파되었다. 성종은 처음에는 대왕대비의 섭정 하에서 왕실불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섭정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억불정책으로 돌아섰다. 연산군은 즉위초에는 할머니 한 대비의 영향으로 불경간행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한 대비가 세상을 뜬
조광조 趙光祖
1482(성종 13) ~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한성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오사화로 화를 입고 회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
Ⅰ. 서론
조광조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의 개혁성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 시기의 나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치국의 도 중에서 왕의 도리를 가장 주요시 여기는 왕도정치였다. 정암은 왕과의 경연에서
조광조는 1482년 8월 10일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조씨 가문은 대대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바 막강한 무장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북면이 토호적 기반이라는 점 때문에 중앙정부로 진출하여 유력한 가문이 되기는 힘들었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한양 조씨가는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도태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