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가장 천재지변에 불안함을 감추지 않는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특히 더 잦아서 실제로 조광조가 위정활동을 했던 4년 간 연평균 100회 정도의 지진 홍수 가뭄 서리 냉해 등의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중종의 예민함에 더 자세히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재해가 많았던 것이 사실
정치가 분화되지 않아 지성인으로서만 살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고식적인 과거제를 혁신하여 왕조에 새로운 기풍을 심으려 했던 노력이나 당시 기득권자인 정치실권을 개혁하려 했던 일은 그를 높이 평가한 후대에서도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왕조 지배층의 내부에서 자체적
비교>
3. 정치사상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 해야 한다고 주장,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라고 함.
4. 개혁정치
(1) 소격서 혁파 - ‘도교는 세상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사림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중종 초기의 개혁 정치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들은 개혁의 대상으로 훈구 세력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하였고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Ⅱ. 조광조의 시대와 삶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나 청년기의 대부분을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부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이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보냈다. 하지만 1498년의 무오사화로 인해 희천으로 유배되었던 영남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을 만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