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체를 반대하는 편에 섰지만, 그의 산문 중 소품취를 풍기는 글이 적지 않음에 주목하여 정약용을 소품가로 조명하고 있었다.
안대회,『고전산문산책: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참조.
이러한 계기로 조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그동안 비교적 다루어지지 않았던 정약용의 ‘산문’을
취의서”를 발표하고 이 운동의 시작을 알렸으며 일본민예관의 건립과 저술활동 등을 통해 민예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본 논문에서는 구체적인 민예운동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민예의 배경과 기본이념, 야나기의 조선관과 민예운동의 전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민예의 배경에서는 일본근대의 상황
1920년대에는 1910년대부터 성행하던 신파극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그 극복의 움직임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데 그 전환의 중심은 유학생 중심의 학생극 운동이었다. 그들은 충격적으로 도래한 새로운 현실, 예컨대 나라 상실이나 자본주의의 맹아 등 훼손되고 파괴된 종래의 질서체계를 대신하는 갖가지
<전략> 정(鄭)나라 어느 고을에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학자가 살았으니 북곽 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는 나이 40에 손수 교정(校正)해 낸 책이 만 권이었고, 또 육경(六經)의 뜻을 부연해서 다시 저술한 책이 일만 오천 권이었다. 천자(天子)가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히 여기고 제후(諸侯)가 그 명
1.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생애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소설가, 문신, 학자로서 1737년(영조 13) 2월 5일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烟湘),열상외사(列上外史)이다.
고려말의 문호 박상충,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