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김매순,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이 책 역시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농민의 생산과 경제에 초점을 두었다. 수령 직무 54개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전정(田政)으로 보고 양전에서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개혁 방안을 전론(田論)에서 결론지었다. 정약용은 조세 관리에
백성으로 밭을 삼아서 살과 뼈를 긁어내는 것으로 농사를 삼고 가렴주구하는 것으로 추수를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당시 실정을 규탄하면서 수령의 실천윤리를 제시했다.
<목민심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편 〈부임〉에서 제4편 〈애민〉까지는 목민관의
다산은 15세에 홍화보의 딸(풍산 홍씨)과 결혼했다. 마침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서
사람들이 행정에 대하여 갖는 견해나 관점 혹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다산의 행정사상이란 행정에 대하여 다산이 가졌던 견해나 관점 및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의 행정사상의 연구는 누가 그것을 하든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전통적인 유교적 통치 국가의 행정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