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다.
그의 독립 투쟁의 생애(生涯)가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압도하여 오히려 그의 시의 본질을 왜곡 당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올 만큼 그는 삶과 하나된 민족 시인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33년 『신조선(新朝鮮)』에 처녀작 <황혼>을 발표한 이래 육사의 시작(詩作) 생활은 만 40세로 죽을 때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논문·평론·번역·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에 재능을 나타났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와 시 <실제>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교목><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작발표는 주로
이육사를 중심으로 그들이 전개한 시 세계를 통하여 1930년대 시에 대해 알아봄과 동시에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한국어의 훈련과 그 의미
식민지 후기의 한국 시는 일제의 악랄한 검열 제도와 우민화 교육정책 때문에 깊이 있는 시를 창조하지 못한다.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
시인이다. 감정의 절제란 막연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되 직접 노출시키지 않고 제 3의 사물이나 정황을 통하여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것을 뜻한다. 이숭원, 위의 책, p.76
「유리창琉璃窓 1」은 감정의 절제와 감각적인 이미지즘을 잘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