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박제가
후사가 네 사람 중에서 사회사상의 각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박제가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가치를 가지지 않은 시문도 아울러 배격했으며, 문학을 하되 사회의식과 밀착시켜 세상에 이롭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전통과 획일주의를 거부하고 자기의 개성을 담고 있
신광수의 호에서 석(石)을, 석불 선생의 뜻을 좇겠다는 의미에서 艸(초)를 사용한 것이다.
로 써 왔다. 석북 신광수의 후손답게 그의 가계는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명성을 내내 유지했다. 그의 부친은 두 사람의 가정교사를 두고 한학과 신학문을 동시에 교육시켰다. 석초의 부친은 권국담 선생을 초빙하
신광수가 지은 <석북집>에서 처음 등장한다.
시조의 명칭
연원을 외래기원설과 재래기원설로 나누어 본다.
외래기원설: 시조의 형식적 모태를 중국의 한시나
불가에서 찾는 견해
재래기원설: ① 이희승, 신가와 속요가 시조의 연원
이다.
② 이병기/가람, 고대(삼국시대)의 민
요형이 시조의 연원이다.
신광수의 〈시절가(時節歌)〉의 구절 "시조는 장단을 배제한 노래로서 장안(평양)의 이세춘으로부터 왔다."가 떠오른다. 이 해석은 ‘이세춘이 시조를 부른 한 사람이었다.’라는 뜻이 알맞지만 현 교과서에는 ‘이세춘이 시조를 만들었다.’라고 나타나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는 교과서 집필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