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조선후기 조일관계에 있어 최후의 통신사인 1811년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는 이전의 사행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이제까지의 모든 통신사는 에도(江戶)를 방문하여 도쿠가와(德川)장군을 직접 만나서 국서(國書)를 교환하고 접대를 받았지만, 여러차례의 교섭 끝에 겨우 실현된 이 통신
Ⅰ.조․일관계 대외인식
1.국교재개와 피로인
1592년 4월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 11월까지 약 7년여에 걸쳐 지속되었다. 물론 7년 동안 계속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전후 조선이
일본 : 모리야마, 조선 : 신헌
일본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것 추궁
일본은 조선과 교역을 요구. 조약을 맺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만국공법의 기본이라 주장
일본은 조약을 맺지 않으면, 거느린 군사 4000여명과 후에 또다시 침공하겠다고 위협
이후 개화파의 형성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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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원군의 삶과 정치
1820(순조 20)∼1898(광무 2).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 이구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이다. 헌종 9년(1843)에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 천장 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 도총관 등 한직
1. 서학
조선왕조가 17세기 임진, 병자년 양란을 거치면서 나타난 생산력의 변화는 사회의 물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거기에 토대한 기존의 신분질서 자체를 붕괴시켜 봉건사회 체제를 급속히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상부구조인 유교주의에 대해서도 적합성,정체성 통합성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