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이상의 자제, 태학에는 5품 이상의 자제, 사문학에는 7품 이상의 자제만 입학할 수 있도록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귀족가문의 관직 세습을 보장해 주는 제도인 음서가 보편화되고, 문벌귀족들은 이를 통해 가문의 세력을 강화하고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품 이상의 자제 등에게 입학이 허용되었고, 대학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등에게, 사문학은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제 등에게, 율학과 서학 그리고 산학의 경우는 문무관 8품 이상에게 허용되었다. 그리고 국자감의 학제를 규정한 [식목도감]이라는 책에는 공(工), 상(商), 악(樂) 등 미천한 일에 종사하는
품을 공급하는 양현고, 식당 등 모두 96칸에 이르는 기본 건물이 갖추어짐. 이어서 문묘종사 의 일을 담당하는 전사청, 도서관인 존경각 등이 더 지어짐
* 연산군 때 성균관이 왕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는 파행 → 중종 즉위 후 이전의 교육기능을 재회복
* 임진왜란 때 거의 불탔고 → 1601년(선조34
김병연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구전성 고찰
- 차 례 -
Ⅰ. 논의의 성격
Ⅱ. 시대적 배경과 김병연의 생애
Ⅲ. 김병연 시의 구전성 고찰
1. 19세기 문학사의 전환기적 면모와 김병연의 문학
2. 김병연 시의 구비문학적 성격
3. 김병연의 시가 지니는 구전성과 그 의의
Ⅳ. 마무리
Ⅰ. 논의의 성격
설화에 있어서
Ⅰ. 개요
고려는 개국 당시 전적으로 신라의 제도에 의지하였고 이어서 당의 제도를 모방했는데 초기에는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상황이었다. 그 후 성종 시대에 이르러 제도가 정비되었고 학제 또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왕조의 학제에는 중앙에 있는 국자감과 동서학당과 오부학당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