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 시조의 창작배경
신흠의 시조는 계축옥사 이후에 겪게 되는 정신적 혼란과 충격으로 배태된 것으로서 그의 시조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계축옥사에 대한 그의 정신적 충격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그의 작품 <방옹시여>는 그가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고 선영(先塋)이 있는 김포로
이정구나 신흠은 고문의 본보기를 보여주어 높이 평가되면서, 격식을 더러 어긴다는 말을 들었다. 성리학의 저술에서 볼 수 있는 주소(注疏), 어록(語錄)에 쓰는 문체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절심(切深)하고 아려(雅麗)하고 가지런한 기풍을 제대로 갖춘 문장은
2. 조식의 ‘두류산 양단수를~’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겨셰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원문해석] 지리산에 있는 양단수 물줄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옛날에 듣고 이제 정말로 와서 보게 되니, 복숭아꽃이 떠있는 맑은 물에 산
신흠의 시조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는데 이 작품은 그가 광해군 시절 대북파와 소북파 간의 당쟁의 폐해로 어지러워진 사회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이러한 암담한 현실로 인해 겪었던 시름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신흠의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