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고 흥아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중국의 언론인 왕도(王韜)는 ‘제흥아회의두기폐론(題興亞會宜杜其弊論)’이란 논설에서 ‘일본인이 까닭도 없이 대만을 공격하고 유구를 삼킨 것을 보면 도무지 흥아회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 반면 한국인들은 순진
일본의 야합이 최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려는 민족독립운동인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중단시키려는 동아시아평화운동이었다. 당시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위기 속에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문명개화를 이룩한 일본이 중국
(1) 의열투쟁의 시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는 특별히 배일사상을 갖고 있지 않던 안중근은 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한 것이 결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한국을 병합하여 대륙침략의 발
일본 국방에 깊은 관계가 있다면서 국방력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을 제시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사토 노부히로가 "일본의 각 부(府)가 각각 조선의 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를 하나씩 맡아서 진공할 것"을 제기하였다. 메이지유신 뒤에 일본 조야의 한국침략론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정
한국 독립만이 아니라 이토의 조국인 일본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의거의 진실은 당장에 어렵다고 한다면 훗날에라도 반드시 밝혀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 땅 문주를 무대로 러시아·일본을 비롯하여 서구 열강이 패권을 놓고 각축하던 상황에서 만주 분할점령을